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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o/My Dail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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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nyKoo 2010. 11. 18. 23:46
강남역에서 강집사님을 모시고 sKBS 전체모임을 가졌다. 토즈 라는 모임 전문 공간이었는데 색다르고 좋았다. 다만 너무 후끈하게 히터를 틀어주어서 좀 피곤하긴 했다. 2시간 반여많에 도착한 지라 나는 지칠대로 지쳐있었지만, 마치 미국에 있는듯한 많은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조우는 신선하고 재밌었다. 내가 디시에 와있는 건지 착각할 정도였다.

모임 후에 집사님과의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간략한 내 상황 소개를 '어푸어푸' 라고 말씀 드리고,
모든것이 어떤 면에서 귀찮고,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피곤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주인공에 내 자신을 넣어버리곤느 소설 속의 주인공이 행동 사고 하는 방식대로 그대로 풀어버리는 일종의 현실회피를 한다고 말씀드렸다. 집사님은 씁쓸한건지, 넉넉하기만 한 미소와 푸근함으로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하나님께 붙어있으라는 말씀만은 꼭 강조하시고는 우리는 헤어졌다.


KBS 의 사람들은 여전히 말씀으로 기도로 성장하기 원하고 다른 지체들을 어떻게 케어하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어쩌면 그렇게 주의 군사들로써 주님이 원하시는 부분만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지 정말 존경 그 자체였다.
나는 이렇게 혼자서 혼자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서 어푸어푸 거리고 있는데, 나도 예전에 정말 그런 적이 있었나?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점점 더 불편해지는 것은,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 사람의 삶, 관계 복음, 능력 구원 죄 등을 통합적으로 생각해볼 때에, 신앙 생활을 '말씀' 과 '기도' 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마치 동아전과에서 수학 중간고사는 이런 이런식으로 어프로치 해야한다고 소개하는 것같아 매우 불편한 요즘이다. 누구는 한국에 와서 한국에 물들었기 때문에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내가 하나님과 멀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느 순간보다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 그리고 나의 삶, 그분의 목적에  대해 신중하고 진지한 적이 없다. 예수는 이젞껏 살면서 어느 순간보다 , 많지 않지만 어렵지 않지만, 진지한 대화가 조금씩, 신음하는 목소리로 통신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 계기는, 한국의 '현실' 이다. 끊었던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내가 내 안에서 분리하고 '종교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말 길거리에서 토하고, 이 세상 현실에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교회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이 현실의 더러운 가장자리에서 기어다니며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과, 내안에 예수를 가지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과틑 한 끝차이 인것 같다.

평생 교회를 다니며, 교회에서 교육을 받으며, 교회에서 시작해서 교회로 끝나야만 하는 사람들은 내가 그냥 세상과 어울린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내가 너무 변명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필립 얀시가 그렇게 몸을 파는 여성들과, 마약, 그리고 동성애자들에게 '은혜'를 설명하는 도중, 많은 생각과 묵상 그리고 만남들을 가졌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요즘에는 그 필립얀시의 고민의 한 2퍼센트 정도는 이해를 할 것 같다. 유진 피터슨이 신자/불신자를 가르지 않고, 문학작품을 통틀어 '작가'들에게 무한한 존경심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과정속에서의 이야기꾼들, 일명 'story teller' 들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도 많은 공감을 한다. 한때, 신앙서적중에서도 교리 중심으로만, 설교 중심으로만 책을 읽었던 나로써는 정말 그때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는 생각을 돌이켜본다. 그 당시 나를 매우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던 허모씨도 생각이 난다. 아 얼마나 불쌍했을까?


인간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한국에서는 유혹도 많고, 강집사님 말씀대로 4천만이 한 방향과 유행으로 가는 시대에서 역류하기란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같은 경우는 4천만과 같이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역류하지도 않는다. 마치 그 4천만과는 색다른 방향으로 조용한 강가에 가서 낚시나 하고 있는 기분이다. 하나님과의 씨름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고있지는 않기 때문에 그렇게 멋지게는 그려낼 수 없다.

술을 마시고, 토하고, 울고,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되어간다고 해서 외로워 하는 이들에게 이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딴 쓸데없는 것들에 정력을 쏟아붓고 있노라고 정죄 아닌 정죄를 하던, 나만 '거룩'한 척 했던 시절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들이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 어프로치가 다르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그들이 얼마나 이 세상으로부터 채워질 수 없는 그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으면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 토를 하고 울며 한탄을 할까. 얼마나 자신이 똑똑한지, 얼마나 자신들이 잘 났는지, 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가졌고 이번엔 무엇을 주문해서 무슨 백을 가지고 다니는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의 안타까운 뒷면에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 the total vacancy 내가 가졌던, 혹은 가지고 있는 그 것과 공통된 부분이 많다는 .. 안타까움과 슬픔이 내 안에 있다.

교회와 교회않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갈과 내 욕심을 가지고 장난 치는 이들, 그리고 순진하다 못해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수많은 '편한?' 상황에서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을 하나님같이 나눠버리는 불편한 종교인들에 대해서 이런 아픈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나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하는데 난 정말 이정도이다. 아직도 남을 정죄하고 있는 나인가? 정말 부질없는 짓이고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

코이노니아는 정말 무엇일까?  에클라시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 친구는 내가 뜨거운 교회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정말 뜨거운 것이 그 뜨거운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내 안에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랑을 나누냐고 했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언제나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충분히 넘치는 모습만을 보이고, 우울하고 힘든 모습들은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때는 교회에 숨어있거나 내 자신이 다시 충만해질 때까지 세상과 조우하면 안되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힘들고 쪽팔리고 찌질하고 넘어지고 근데 그 안에 내 안에 예수가 있고 나의 위로자 예수가 있다는것이 하나도 창피하지 않다.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지 않고, 하나님의 대사라는 사람이 그따구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창피해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그것도, 경제의 원리, 마케팅의 원리가 우리 '전도' (굳이 정말 요즘은 전도라는 말이 정말 싫다. 너무나도 종교적인 어휘라고 생각을 한다. ) 하는데 있어 마이너스가 되는 부분이라 계산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하시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서 계산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다른 외적인 부분에서는 아주 자세하기 계산을 해서 결제를 올리곤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가?

현재 내 안에서의 예수는... 신음하고 힘들어하며 쪽팔리고 찌질한 내 자신의 안에서도, 내가 유일하게 버리지 못하는 내세울게 하나 없지만 그래도 자랑할 수 있는, 그래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아무런 논리가 들어있지 않은. 그런 존재가 나의 예수이다.

한준 간사님 말씀대로, 하나님은 나때매 지금 무지 고생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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