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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침묵의 필요성

JohnnyKoo 2013. 7. 23. 21:33

핸드폰을 반납했다. (예수원에서) 우리 생활에 여러모로 많은 편리한 기능들과 안좋은 기능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 녀석을 자발적으로 빼앗길 때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아니 생각보다, 스스로 이 스마트하다는 폰을 제어하기란 쉽지 않다. 생각보다 더 쓸데없이 많은 정보들을 제공하는, 그러나 편의에 맞게 내 입맞에만 맞게 제공하는, 그래서 더더욱 쓸데없는 정보들이 물밀듯이 흘러들어오는 이 기계는 정말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기계이다. 임베디드 시스템의 발달로 더 빨라지고 더복잡해지지만 인터페이스는 편리해지는 이 기기는 정말 애물단지다. 암튼 서론이 길었는데, 이 녀석을 일상생활에서 적절히 좋은 쪽으로만 사용하기란 쉽지 않다.


아래 내용은 '스마트 폰' 에 관한 내 개똥철학이니 무시해도 좋다.

나 는 개인적으로 이 스마트폰이 오용되는 부분에 있어서 감히, 전혀 영적이지도 않은 내가, 엄청난 사탄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탄은 우리에게 복음을 버리라고 꼬시지 않는다. 다만, 한손에 스마트폰을 제공해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복음을 무시하고 영적이며 일상생활에 뿌리 박힌 영성의 일상에서의 주님과의 동행을 무시할 정도로 스마트폰에 중독되기 쉽다.


서 울에서 지하철을 타면, 모두가 조그만 기계에 집착하고 있다. 아니 중독되어 있다. 100이라면 그 중에 책읽는 사람은 2-3명이 채 되지 않는다. 직장인들부터 대학생, 그리고 중고등학생, 그리고 초등학생, 요즘은 유치원생들까지..

우리나라 국민 전체가 스마트폰 중독에 놀아나는 것 같다. 살인 진드기는 사람이 죽으면 뉴스에라도 나온다. 스마트폰에 중독이 되어 영혼이 죽어가는 것은 뉴스에 나오기 쉽지 않다. 교회 내에서도 스마트폰 사용을 예배중에 지양? 할 뿐이지, 더이상 깊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분히, 최신의 문제이고, 생각보다 대처할 인력이 ? 없다는 이유에서인 것 같다)


스 스로도, 생각보다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는 시간이 꽤 많았다. 최근 들어서야 조금씩 조금씩 줄여서, 연습하고 절제하고 있지만, 내 스스로가 궁금해서, 이 스마트폰 중독의 이슈가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고 검색을 했더니 거의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가는 삶에서 스마트폰과 관련된 내용은 많지 않았다. 역시 오래되지 않은 이슈라 그런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와 상관없이도 스마트폰 중독에 관한 내용은 '청소년들 스마트폰 중독 심각' 이런 제보성 기사밖에 없다. 진지하게 연구되고 있는 내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좀 더 영적으로 민감하게 대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 실, 꼭 스마트폰 뿐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는 언제나 주님의 말씀과 기도를 방해하는 존재들이 많았다. 그 옛날 옛적에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공통되게 방해하는 냉장고와 티비는 우리의 영적인 삶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였다. 냉장고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티비는 뭐랄까, 힘이 많이 약해졌고 더 다양하고 handy 히지고 포터블해진 스마트폰의 위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더 무서운 것은 스마트폰을 이용한 SNS 이다. 이 소셜네트워크는 우리의 거짓된 자아를 만들기 쉽다. 사실 나도 페이스북을 너무 오랫동안 해 와서 할 말이 없다. 줄여나가거나 없애거나 해야하는데, 핑계는 간간히 올리는 사진을 우리 가족들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핑계라, 없애도 상관 없지 않을까 고민중이다.



예수원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터넷도 접수처 말고는 사실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컴퓨터 사용을 전혀 안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요점은, 그들의 쓸데없는 곳에 정력을 쏟지 않는 태도는 본받을만하다라는 것이다.

무 엇에든지 '중독'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게 한다. 주로 '재미'있는 것들은 한번 의십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요즘 '관계 중독' 이 의심되는 내 스스로를 돌아본다. 이것은 내가 단한번도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었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나는 집에 없을 때에는, 즉 밖에 싸돌아 다닐 때에는, 언제나 누굴 만나고, 그것이 여친이었든, 친구였든, 교회 활동이었든 혼자 돌아다니면 이상한 생각이 들고, 왠지 찌질해보이고, 왠지 뭐랄까. 아무도 세상에서 날 care 하지 않는 것 같고 그랬다. 사실 최근 연애를 그만두고 나서도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자꾸만 친구를 만나고, 누구와 밥을 먹고 그랬던 것 같다. 예수원에 가기 전부터 조금씩 혼자 있기로 했다. 혼자 있는 연습을 하려는건 아니었다. 왜 자꾸 내가 누구를 찾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싶었다. 아니 왜 ? !!! 혼자 있을 때에도, 은연중에 나 혼자 어디에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한 나는 정말 유치했다.


현 실에 뿌리박힌 다윗의 영성인가? 호정이 형이 빌려준, 예전에 이 곳에서 여러번 회자되었던 이 책에서는 '광야'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다윗에게 '광야'는 너무나도 힘든 곳이었지만,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정말 꼭 필요했던 곳이라는 말이 기억이 난다. 우리에게 모두 '광야'가 필요하며, 그 '광야'를 자주 찾아가며 그 곳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하낟고 피터슨은 말한다. 그것이 나에게 '골방'이 될 수도 있고. 커피샾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침묵 기도 시간일 수도 있다.




한국에 와서, 한국에서 못본 사람들은 언젠가 한번 만나 밥먹어야 겠다고 사람 체크리스트를 만들기도 했었다. 작년부터였나, 못보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생각보다 회의가 든다고 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다. 꼭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만나도 그닥 달라지는 것들은 없다. 그러면 왜 만나야 하는가? 꼭 그 사람이 아니여도 상관 없는 것이었다. 뭐랄까, 무언가 지속적인 정기적이지 않더라도, 나눔이 있는 인연들은 반갑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말 그 동안 단한번도연락 없던 사람들은, SNS의 발달과 mobile 서비스의 발달로 괜히 한번 더 연락하게 되는 것이다. 모바일이 발달되지 않았어서 유선으로만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을지라도, 만나야 할 사람들은 편지를 써서라도 만나게 된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사실 그만큼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 이 생각들은 정말이지 개인적인 생각들이므로 무시해도 상관없다. 첫 문단부터 무시하기 시작했으면 따로 이 코멘트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심심할 때마다 아무 이유없이 핸드폰을 꺼내서 손가락이 돌아가고 있으면

우리 스스로 정말이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중독' 에 대해서 말이다.



예 수원에 가기 전에, 이런 중독이라면 중독에 걸린, 기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이상한 크리스쳔인 나 스스로를 돌아보며 이래서는 안되겠다. 한준 형님의 무언가 내게 전하려는 그 마음을 무시해서는 안되겠다. 결국 주님의 잔잔한 그.. 음성을 들어보고자 헨리나우웬을 찾아가기로 했다. '기도의 삶' 이라는 이 작은 책은 정말이지 너무 재밌다. 깨달음 전에 재밌다고 말하고 싶다. 암튼, 줄쳐가며 읽던 책의 내용을 살짝 나누고자 한다.



-'기도의 삶'은 갈망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이 모두 포함된다.

- "기도란 그 음성, 나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시는 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 기도의 삶은 우리에게 경청과 훈련에 대한 교훈을 들려준다.

- 우리 내면에는 우리를 산만한 활동으로 몰아가는 어떤 '힘' 이 있다. 우리는 삶이 정신없이 바쁘고 피곤하다고 불평하면서도 인내의 훈련을 한사코 마다한다.

- "사실 마음의 기도란 일상의 많은 파도 밑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시냇물 같은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안에 살아가며, 고독의 한복판에서 우리 하나님께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기서 열린다"

- "내 삶이 곧 기도니깐 굳이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다" 가 아니다.

- 마치 하루종일 친구들과 함께 일하고도 저녁때 다시 그들과만 있는 것이 좋은 것과 같다.

- 사람들은 흔히 갈망이란 물리쳐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은 곧 갈망하는 것이다. (중략) 신앙훈련이란 갈망을 몽땅 뿌리뽑는 길이 아니라, 갈망끼리 피차 섬기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도록 질서를 잡아주는 길이다.

-기도의 필요성, 쉬지 말고 기도해야할 필요성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 보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에 근거한 것이다.

기도를 시작하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 일단 홀로 시간을 보내는 일에 꾸준히 자신을 드리면 내면에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민감함이 생겨난다. 처음 며칠, 몇 주, 혹 몇 달 동안은 시간 낭비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고독의 시간이란, 처음에는 마음의 숨은 부분에서 오만 가지 생각과 감정이 요동쳐 나오는 시간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초대교회의 어느 그리스도인 작가는, 고독한 기도의 첫단계를 오랜 세월 문을 열고 살다가 갑자기 문을 닫기로 한 어떤 남자의 경험에 빗대어 말했다. 그 집에 드나들던 객들은 왜 더 이상 못 들어가는지 궁금하여 문을 쾅쾅 치기 시작한다.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이들은 서서히 발길을 끊는다...

- 그러나 정작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다. 아무도 귀찮게 하는 사람 없고, 내 생각에 몰두할 수 있고 내 신세타령에 빠질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내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다. 우리에게 고독이란 대부분 프라이버시로 통한다.


- '고독' 속에서 나는 모든 디딤돌을 치운다. 친구와 대화도 없고 전화도 걸지 않고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고 독서로 마음을 산만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 혼자다.

- 내가 고독속에서 직면해야하는 것이 바로 그 무의 상태다. 무란, 내 속의 전 존재가 금방이라도 친구나 업무나 오락으로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무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뭔가 대단한 존재라 믿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독 속에 머물기로 결단하는 순간, 번잡스런 생각과 산만한 이미지와 어지러운 공상과 이상한 연상이 바나나 나무의 원숭이들처럼 내 마음속을 헤집고 돌아다닌다. 분노와 탐욕이 흉측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는 또 한번 어두운 무의 심연에서 벗어나 온갖 허식으로 거짓 자아를 되찾으려 한다.

모든 유혹의 객들이 문을 두드리다 지쳐 내게서 손을 뗄 때까지 고독을 포기하지 않고 골방에 남아있는 것, 그것이 관건이다.


- 침묵이란, 타인과의 대화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나누는 대화마저 멈추는 시간이다.



내 자신과의 대화까지 멈출 수 있어야 한다라니. 무리한 요구다. 아니? 정말 할 수 있는 것일까? 방법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면, 지나치게 물리적인 부분, 즉 내가 10분동안 앉아서 움직이지 않도 딴짓하지 않고 내 스스로랑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내 스스로를 높이는 시간을 갖지 않는것, 지나치게 물리적인 부분일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영적으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그래서 일정부분, 꽤 많은 부분의 '스님'들이나 사제들은 이 '영적인'부분에 꽤나 능숙하다고 말하고 싶다. 요는, 그 어느 한 지점까지 가는 부분은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비로 그들이 예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진리를 찾으려 애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곳에서 출발하는 쪽들도 처음에는 비슷한 길을 가지 않나 싶다는 것이다.


이제 너무 길게 썼으니깐, 예수원에서 내 스스로 '기도' 에 관한 탐험 이야기는 나중에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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