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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전서 1:1-9 본문
첫 두 절에서 엄청난 소속감을 느낀다. 1번은 나를 배제하고 나서 사도 베드로와 그가 말하고 있는 대상들 사이에서,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힘을 합쳐 함께 악을 물리치기로 약속을 한
피로 맺은 형제들처럼, 아니면 삼국지에서 동맹을 맺은 군사들 처럼 그러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끈끈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러나 삼국지나 반지의 제왕에서 처럼 서로의 이익을 위한 그 무언가의 그런 연결이 아닌,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 즉 긍휼과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 그분이 미리 아시고에서 예정설로 갈 필요 없이 중요시 되는 것이 정말 우리가 그 택함을 받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선택받음에 대해서 We deserve Nothing, None 이라는 은혜와 자비의 뜻을 품고 있다.
deserve 하지 않는 것을 아무리 구해도 받을 수 없는 것을 그분의 이해할 수 없는 찌질하기 까지 보이는 멋지지 않는,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한한 아니 이해할 수 없기에 감사의 말조차 함부로 꺼낼 수 없는 그런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자들을 선택 하시고
그런데 선택을 한다는게 무엇? 바로 그분의 외아들의 피흘리심을 통해 그 피가 우리에게 뿌려지고 속죄함을 받고 그분의 삶을 우리에게 copy and paste 해주시다니.
그 분의 피로 거룩, 즉 구별 되게 하셨다. 구별 되서 좋은게 뭔데? 난 아직 구별 되서 막 좋은걸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에게 좋다고 한다. 거룩하여지는 것이 바로 그분을 닮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맛'을 모르는 나에게는 아직까지 얼떨떨한 말일 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믿음이 있다 바로 그것이 정말 좋은것 이란느 것. 바로 그것은 베드로가 말하듯이 예수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되겠고, 즉 그것은 없어지는 세상의 그 무엇들 과 같지 않을 것이고, 썩지 않을 것들이다. 그것은 구원과도 큰 연관이 있다고 하는데, 구원은
어떠한 한 상태의 status 혹은 point 를 의미하는 것 같진 않고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서 다각도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스도가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되셨다.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확증이심이고 내가 왜 예수를 믿는지, 증거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본 적이 없지만 '믿음' 으로 그 분의 행적과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다. 거기에는 어떠한 과학적 논리적 증거가 불가능하며 불필요 할 뿐이다.
나의 삶에 예수를 빼놓고는 living hope 이라 불릴마한 것들이 없다 .예전엔 있었으나, 조금씩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이 True living hope 이 되지 못한 다는 걸 느껴가는 중이다. 그렇기에 예수를 떠나 불순종의 하루를 살았을 때, 나의 공허함에서 나오는 그 vacancy
정말 진공상태, 아무것도 없음에서 내 안에서 나오는 역겨운 죄악들로 인해 괴로울 뿐이다. 예레미아는 그것이 바로 스스로 죄로 얻어지는 심판이라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원래 그분의 호흡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죄를 즐기지만, 결국 그분의 빛을 쪼인 항생제들인 우리는 그 죄로 인해 괴로워 하게 될 뿐이다. 선택되어진 사람들은 그렇게 더럽고 썩는 것들에 대해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분의사랑과 은혜가 없을 수록, 그 죄 안에서 즐기며 그 죄가 나를 만족시킬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분의 보호하심이 항상 행복하기만 한것은 아니다. 베드로가 말하듯이,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잠깐, 여기서 '잠깐' 에 속지 말자. 세상에 여러 간증들을 들어봤지만, 대부분 그 '잠깐' 에 속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정말로 우리가 이해하는 '잠깐' 몇일, 몇달 몇년 정도로 그 슬픔이 지속되다 끝나고 무한한 행복이 온 적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 '잠깐' 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뒤에 우리의 믿음이 순결하게 되는 것이 불로 금을 연단하여서 순하여 지고 결국 다 없어져 버리는 것보다 귀하다고 한다.
결국 이 시험은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욕정되로의 모습을 모두다 태워버리고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뜻일까. 우리의 생명조차 날아갈 수 있다는 말일까. 그러나 그 어려움과 슬픔이 있게 되어서 우리의 믿음이 순결해진다고 한다. 실제로 나의 생활은 주말이나 나태함이 주어졌을 때에 , 오히려 할 일들을 못하고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내가 안전하고 편안 할 때에, 예수님과 친해져 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가? . 어렵고 힘들고 최악일 때 새벽 기도를 나갔었고, 기도를 더 많이 했었고, 그분을 계속 구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stable 하지 않은 인생을 두고 불평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오늘도 퇴근하고 오면서 장을 보면서 나를 툭툭 치고 가는 직원을 바라보며, 침을 찍찍 뱉는 알흠다운 우리 고딩 동상들을 보며, 사는게 짜증이 났었다. 짜증은 예수에게 로 향하기 마련이다. 받아주실까?
나의 믿음이 순결하게 그렇게 연단되게 해달라고 고난을 주십사 하고 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용감했고 순수했다. 지금은 감히 그렇게 기도하기가 힘들다. 정말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지금의 환경에서 나아지기많을 바라고 있다. 환겨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그분의 시험과 연단을 거부하고 당신을 믿기에 좀 더 편한, 수월한 자리를 요구하는 것인가? 그분을 믿음으로 인해 목숨이 왔다갔다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
나의 믿음은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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