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ornever
ch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본문
기니스는 '일(work)'을 이야기하며 소명을 설명한다. 현대인들은 일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중간에 일에 대한 변증은 솔직히 좀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힘들다. 해석이 잘못된건지 아니면 원문으로 읽으면 더 헷갈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주의깊게 읽은 부분은 저자는 소명을 '부르는 이가 있는 소명' 과 '부르는 이가 없는 소명' 으로 나누는 점을 보고 싶다.
확실히, 이 세상에서의 일이나 소명은, '나' 로부터 시작한다. '나'로 부터 시작해서 '주변'의 기대와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 그 방향과 가치가 결정된다. 그러나 저자는 '부르시는 이'가 있을 때, 소명은 다른 의미가 된다고 말한다. 이미 저자는 '소명' 을 전임사역자에 국한되어 쓰이는 말이 아니라고 4장에서 명확히 말해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교회사역 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
'개신교적 왜곡' 과 '가톨릭적 왜곡' 에 대해 설명한다.
'개신교적 왜곡'은 세속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완전히 단절시키고, 소명이란 용어를 일을 대치하는 하나의 용어로 축소시켜버리는 것을 말한다.
'가톨릭적 왜곡'은 세속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영적인 것을 격상시킨, 이른바 영적인 이원론이다.
저자는 거듭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어떤 일을 하느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이' 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를 부르시는 이의 것 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차적인 무엇을 하는 것을 무시해도 된다고 는 저자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도 죄인이어서, 언제나 '나' 중심이다. 아무리 부르시는 이가 있다고 믿고 인정하고 '소명'을 생각해도. 그것은 짧게 앞부분의 인트로 부분이고 결국 우리가 집중하게 되는 부분은,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의 구체적인 부분을 집중하게 마련이다. 또한, 그러한 방법론의 종류에 따라 어느 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어느 길이 더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는지, 우리가 하나님에게 '도움'을 주려고 발악한다. 당신의 나라에 우리를 '참여' 시켜주신 것이지 우리가 없으면 당신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른다는 것 자체에 감동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감동은, 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결국 부르신 이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감동이 없는 것 같다.
나의 소명의 마지막은 '하나님' 이 되었으면 한다. 나의 소명은 '당신'이었으면 한다.
내 소명이 '당신' 이어서, 나의 모든 삶의 부분 부분 들이, 그분의 속성과 싱크로나이즈가 되면 좋겠다. 매우 추상적인 말이지만, 그분의 은혜의 물을 퍼다 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의 물에 풍덩 빠져서 나와서 당신의 속성을 나타내고, 다시 부족해지면 퐁당 빠지고 싶다. 아니, 뿌리를 내려서 꾸준히 영양을 공급받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정직과 'integrity' 내가 실제 직장에서 지키고 싶은 것이다. 사실 부르신 이가 없다면, 이것은 '윤리'가 된다. '윤리'를 지켜야 하는지 아닌지, 그 선은 어딘지 '이론'들은 수없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어렵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 이 되지 않는다. 그 정직과 인테그리티가 왜 지켜져야 하는지의 이유, 즉 나를 부르신 이의 속성이 이러하기 때문에.... 라는 것이 나에게 힘이 되고 이유가 됬으면 좋겠다. 일을 하다보면 정말 순간 순간, 거짓말을 하기도, 또 외부의 압력에 이끌려 그러면 안되는 것들을 대충 넘기게 마련이다. 내가 피해를 보고, 욕을 먹고, 왜 그렇게 꽉막혔냐고 하여도, 돌아가더라도 정직하게 일을 하는 것을 직장에서 배우고 싶다.